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고토 회복 전쟁]] ==== || || ||[[파일:Justinian555AD.png|width=100%]]|| || 고토 수복 전쟁이 끝난 직후인 555년의 동로마 제국. || 마지막으로 고토 회복 전쟁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가장 골몰한 사업 중 하나였다. '''자세한 것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참조.''' 최초의 전쟁은 534년에 있었는데,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지휘한 동로마 군대는 압도적인 수의 [[반달족]] 군대를 분쇄하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서 [[북아프리카]]는 동로마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에 고무되어 [[동고트 왕국]]을 상대로 이탈리아 수복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 원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과 7500명(!)의 병력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쥐어주고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를 점령하도록 했다.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나폴리에 이어 고도 로마까지 탈환한 벨리사리우스는 엄청난 병력으로 로마를 포위한 고트족에 의해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혈전 끝에 로마를 지켜 내었고 이윽고 후퇴하는 고트족을 역으로 격파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는다. 이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벨리사리우스의 발목을 잡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라벤나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이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더이상 벨리사리우스를 그가 정복한 이탈리아에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소환되었고 그의 빈 자리는 여러 명의 장군들에게 맡겨졌으나 새롭게 왕위에 오른 젊은 고트족 청년 [[토틸라]]에 의해, [[시칠리아]], [[사르데냐]]와 남이탈리아 일부 도시를 제외한 이탈리아가 다시 한번 고트족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한번 파견되었지만, 황제의 지원 없이 그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위기의 이탈리아를 구한 것은 70대의 늙은 환관 [[나르세스]]였다. 그는 황제를 잘 설득하여 여러 부족의 용병이 포함된 3만 5천의 군세를 이끌게 되었다. 552년 나르세스는 라벤나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고트족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타기나에 전투]]에서 게르만족 최강의 기병을 자랑하던 고트족은 분쇄되고 토틸라는 사망한다. 이제 동고트 왕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나르세스는 이 틈을 타 이탈리아를 노리던 프랑크 왕국을 쫓아낼 필요가 있었다. 결국 554년 카실리눔 전투에서 게르만족 보병의 강자였던 프랑크 왕국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제야말로 이탈리아는 제국의 패권하에 놓이게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이때 이미 나이가 70대 중반이었으며, 장수를 누리긴 했지만 결국 이탈리아를 13여 년간 통치하는 선에 그쳤다. 그 동안에는 로마 시에서 나르세스에게 가혹한 통치에 대해서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이 '''차라리 [[그리스인]][* 이 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들보다 동고트인을 모시는 게 낫겠다'''고 했을 정도로 통치가 빡빡했다고 한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 그가 죽자마자 북방에서 밀고 내려온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8세기 라벤나 총독부를 상실하면서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대한 제국의 헤게모니는 종말을 고한다. 이탈리아 동북부의 라벤나에 위치한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있던 [[베네치아]]가 황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하기도 했다. 동로마가 여기서 이탈리아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면 이탈리아 라틴인들과 동로마의 간극은 줄어들수도 있었겠지만 7세기부터의 극심한 쇠락과 영토 상실로 제국은 다시는 그럴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경우 이슬람 세력과 치열한 밀고당기기를 하면서 1071년 노르만 인들에게 최후의 거점 바리(Bari)가 함락될 때까지는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바리가 함락된 이후에도 마누일 1세가 남이탈리아를 일시 회복하고 이탈리아 중부의 상업 도시인 앙코나(Ankona)를 돈으로 매수하는 등(저렇게 자금지원을 한 곳이 앙코나뿐이 아니어서, 마누일 시대는 재정수입도 많았지만 재정지출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1180년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가 죽기 전까지 남이탈리아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